도시에서 생활하는 인물들이 낯선 시골로 들어가서 위협을 받고 신체가 훼손된다는 설정은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이후에 끝없이 변주되는 설정입니다. 현대화된 도시에서의 생활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이성에 근거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이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거나, 가진 척 연기하려고 하며, 관계에 의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인물들을 어느 순간 낯선 공간에 떨어트려 놓고, 그들이 향유하는 도시적인 소품들을 모두 제거시킨 후에, 이성적 분별과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야만' 혹은 '야생'에 가까운 인물들과 맞닥뜨리게 됐을 때의 공포가 이런 장르물의 핵심입니다.
'구타유발자'는 이런 장르물의 기본적인 틀거리를 가져와서 인물들을 좁은 폭력의 링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리고는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을 쥔자의 바로 그 '권력'이란 것을 끝없이 전이시킴으로서 폭력이 이루어지는 관계와 상황을 지켜봅니다. '구타유발자'는 초반에 물씬 풍기는 장르적인 공포와 함께 후반부에 몰아치는 '폭력'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폭력의 무대가 되는 강변에서 등장인물들이 하나 둘씩 등장 할때 부터 삐걱 대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장르적인 선택과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려는 시도가 불완전한 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수가 많은 등장인물들 때문에 인물들의 등장이 느리고, 그들의 캐릭터가 소개되고, 그 캐릭터가 반응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이상의 시간이 할애됩니다. 그 결과 영화의 흐름은 초반부 교수가 제자를 강간하려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타이트함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늘어지고 맙니다. 이 영화가 완전하게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처럼 장르 공식에 충실한 일종의 환타지 물이 아닌, 리얼리즘에 기반한 스릴러물이다보니, 액션이 주는 파괴적인 쾌감이 아닌 캐릭터의 동작과 말씨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할 심리적인 긴장감이 영화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그 늘어지는 흐름때문에 종종 그 긴장감을 잘라먹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앞서 충분히 쌓아 놓았어야만, 후반부에 그 팽팽함 가운데에서 급작스럽게 돌출되는 폭력의 향연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을텐데, 이 부분에서 영화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저수지의 개들'이 보여준 이 방면의 최고에 달하는 수준은 그냥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저수지의개들'의 인트로는 날이 선듯한 대사들과 효과적인 카메라 워킹이 다소 많은 등장인물들을 정리해주고, 앞으로 어떻게 갈 것인지, 대략의 캐릭터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보여주는 훌륭한 장면입니다. 또한 그런 인물들이 속이고 속는 심리적인 긴장감을 끝까지 잘 유지하기 때문에 후반부에 등장하는 '귀자르기' 같은 장면들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구타유발자'는 이런 부분에서 심리적인 긴장을 쌓는데 실패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내내 동반하다가 후반부의 폭력장면이 이런 지루함을 해소시켜주는 활극인양 어설프게 드러나고 맙니다.
첨예한 대립끝에 터져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이제서야 뭔가 나오려나 보다라는 식의 반응을 유도하는 전개인 것입니다.
만약 그 심리적인 서스펜스가 주가 아니고 후반에 무차별로 드러나는 폭력을 눈쌀 찌푸리도록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라면 영화의 설정을 그런 식으로 가져올 필요가 없습니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무참한 폭력씬과 권력의 전이는 사실 그런 설정이 아니더라도 독자적으로 살려낼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 폭력씬의 그 무참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효과적이었는가라고 되 묻는다면 그 역시도 회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타유발자'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여기 나온 인간들은 정말로 '구타를 유발하는' 인간 쓰레기들 입니다. 폭력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에서 나옵니다. '구타유발자'는 이 권력관계가 역전되는 순간의 재미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재미를 넘어서는 성찰이란 것은 그닥 유효해 보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폭행을 유발하는 상황이 던져지고 거기에서부터 폭행이 시작되고,다시 역전되는 것은 그 안의 알레고리들이 충분하게 유효할 때의 성찰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노팬티이기 때문에 강간을 유도하거나, 왕따를 당했었기 때문에 왕따를 한다거나, 덩치에 겁을 먹었다가 유약한 태도에 바로 자신감을 되찾는다거나 하는 것은 그런 설정 하나만으로 유효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권력의 관계로 가져온 설정들과 배경들은 이미 너무 많이 나온 진부한 것들입니다. 군대, 경찰, 왕따, 데이트 성폭력 등은 그 자체로 신선할 것도 없는 너무 잘 알고 있는 폭력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폭행의 그 끝에 있는 경찰의 폭행과 그 기원에 대해서 밝혀지는 순간 역시 그저 예상가능하거나, 미뤄왔던 설정의 공개일 뿐, 어떤 전복적인 요소도, 성찰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타유발'이라는 관점은 굉장히 신선한 관점입니다. 가해자의시선, 가해자의 속성에 기대서 폭력을 생각해 볼수 있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끝없이 폭력의 가해자가 변하는 권력의 전이와 맞물려서 영화를 보게 된다면 폭력에 대한 어떤 새로운 사유에 접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관점을 초지일관 유지하기에는 장르적 유혹에 너무 많이 넘어가 있고, 본격적으로 관점을 제시하기에는 그런 인물들의 권력의 전이가 놀라울 정도로 숨가쁘게 바뀌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저 대개의 활극이 가져오는 액션에서의 상황의 반전과 그닥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가해자의 속성에 기대게 한다음 폭력의 그 살벌함을 화면가득 채워줘서 보는 이로 하여금, 폭력에대해 성찰하게 하려는 의도는 증발해버립니다. 그다지 살벌하지도 않은 폭력씬과 등장인물의 사연이 겹치면서 캐릭터를 이해하는 수준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영화가 폭력에 대한 성찰이거나, 권력이 갖고 있는 폭력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것이라면, 단순한 육체적 폭력이 아닌, 그 다양한 폭력의 카테고리안에서 (정말로) 높은 수위의 폭력성을 보여주었던가, '파이트클럽'처럼 유머러스함을 경유해서 자본주의를 통째로 비웃을만한 배짱을 보여주던가 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는 어쩌면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텍사스 연쇄 살인마'가 나오던 시절이나 어둠의 80년대에 나왔다면 놀랍다고 박수를 쳐 줄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동종의 영화들 중에서 변별성과 영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하는 것은 어찌보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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